사이버 수사반장이 떴다
글/따뜻한 디지털 세상
2006년 05월 31일 11시 15분
“조사하면 다 나와!”
KBS “개그 콘서트”에서 요즘 한창 뜨고 있는 인기 유행어이다. 보통 이런 글을 쓸 때면 특정 방송사에 대한 간접 홍보라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 “모 방송국의 모 개그 프로그램” 정도로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게 사실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짓이다. 웬만큼 TV와 친숙한 사람이라면 어느 방송국의 어떤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말인지 바로 알아챌 것이며, 설령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도 인터넷 검색창에 “조사하면 다 나와”라고 두드리기만 하면 이를 알아내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이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요즘 네티즌에게 궁금한 것은 조사하면 다 나오게 되어 있다. 어떤 사건에 연루된 인기 연예인을 아무리 스포츠 신문이 A모 군, B모 양 이라는 이니셜로 표기해도 이 역시 눈 가리고 아웅하는 짓이긴 마찬가지이다. 인터넷을 잠깐만 뒤져보면 누군지 금방 다 나오기 때문이다. 어떤 연예인이 성형 수술을 한 것 같다는 말이 돌기가 무섭게 그 사람의 졸업 앨범과 데뷔 초기의 TV 장면까지 용케 찾아내서는 “아무개 얼굴 변천사”까지 만들어 올리는 기민한 수사력을 발휘하는 게 지금의 네티즌이다.
설령 수사 대상이 연예인 같은 유명인사가 아닌 평범한 개인일지라도 어느새 그 사람의 미니 홈피까지 추적해 들어가 얼굴 사진과 인적 사항을 뽑아내는 탁월한 수사력을 보여주는 게 지금의 네티즌이다. 수사 기관에서 피의자를 윽박지를 때나 쓰던 이 말이(실제로 이 개그 코너의 배경 역시 수사 기관이다) 이제 네티즌들에게는 단지 유행어가 아닌 실제 상황이 되어 버렸다.
네티즌의 수사력은 인터넷 네트워크를 활용한 공조 수사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는 유명한 어록을 남긴 이른바 “뻥사마”의 음주운전 사건 당시 경찰도 미처 알아내지 못한 증거를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수집하여 확인시켜 준 것이 우리의 네티즌이다. 개똥녀 사건의 주인공이 누군지를 찾기 위해 당시 지하철 탑승객들의 제보 등을 기초로 그녀가 대략 몇 시쯤 몇 호선 지하철을 타고 어디로 이동했는가 하는 내용까지 추리하여 상황을 재구성해 낼 정도로 네티즌들의 수사력은 정말 장난이 아니다. 심지어 황우석 박사 사건 때는 생명공학에 문외한이라 할 수 있는 디시인사이드 과학갤러리 네티즌들이 줄기세포 사진을 분석을 통해 조작 여부를 입증해내는 과학 수사의 쾌거를 올린 수준이니 이쯤 되면 가히 CSI 과학수사대도 울고 갈 놀라운 실력임에 틀림없다.
흔한 말로 밥 나올 일도 아니고 돈 되는 일도 아닌데 네티즌들이 “조사하면 다 나와!”라고 부르짖으며 열성적으로 수사에 나서는 이유는 무엇일까?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인정 욕구’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다른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것, 궁금해 하는 것들을 밝혀내고 알려줌으로써 타인들로부터 자신의 능력과 성과를 인정받으려는 잠재된 욕구의 표출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활약으로 밝혀진 정보가 인기 검색어 순위 상위권에 오르고 인터넷 여기저기로 퍼 옮겨지게 되면, 나아가 그것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몰고 오기라도 하는 날이면 이러한 인정 욕구는 거의 완벽하게 충족되는 셈이다.
특히 인정 욕구는 자신의 행위가 정의감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신념과 맞물렸을 경우 한층 더 정당성이 강화되기 마련이다. 즉 은폐된 진실을 규명하여 만천하에 공개함으로써 시민의 알 권리를 실현하고, 응징 받아 마땅한 문제아를 적발하여 대중들의 비판과 처벌을 이끌어 냄으로써 자신이 사회 정의를 구현시키는 정의의 사도임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정의감이 때로는 오히려 정반대의 나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니셜로 표기된 A모 군, B모 양의 실명까지 굳이 다 파헤쳐 놓는 바람에 심각한 프라이버시 침해를 불러일으키고, 당사자들이 아예 사회적으로 매장되어 버릴 만큼 감당하기 힘든 과잉 처벌을 몰고 오는 경우를 우리는 그동안 여러 차례 목격했다. 뿐만 아니라 개똥녀 사건 당시 잘못된 추리로 인해 전혀 상관없는 대학교가 네티즌들의 사이버 공격에 큰 피해를 입었던 것처럼 자칫 엉뚱한 피해자를 만들어 낼 위험도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정의의 사도가 아차 잘못했다간 한 순간에 천하에 없는 악당으로 전락할 지도 모를 노릇이다.
옛말에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다.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뜻이다. 투철한 정의감에 휩싸여 물불 안 가리고 불의를 파헤치는 네티즌 수사관들의 행동이 미처 생각지도 못한 또 다른 불의를 낳는 것은 아닐지 항상 조심해야 할 일이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이 역시 누가 저지른 짓인지 조사하면 다 나오기 때문이다.
(따뜻한 디지털세상, 2006.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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