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정치, 홈페이지부터 개혁하자
글/How PC & How Internet
2001년 05월 20일 13시 28분
1. 전자 아고라의 잊혀진 신화
인터넷이 처음 막 보급되기 시작할 즈음에는 정보사회의 전망을 둘러싼 온갖 장밋빛 환상이 난무했었다. 정보통신혁명은 현세의 모든 불행과 모순을 해결하고 새로운 신세계로 인류를 이끌어줄 구원의 메시아로 찬양되었다. 앨빈 토플러를 위시한 수많은 디지털 전도사들이 메시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분주히 돌아다녔고, 디제라티와 골드칼라들은 곳곳에 닷컴의 교회를 세워 다가올 천국을 준비했다.
그러나 인터넷이 보편화되면서 사람들은 정보사회가 기대했던 것만큼 대단한 유토피아는 아니라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되었다. 가학적인 관음증과 사이버폭력으로 인터넷은 오염되어 갔고, 거품이 빠진 닷컴 기업들은 몰락의 길로 치달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정보사회가 오히려 디스토피아로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들이 힘을 얻었다. 언론은 연일 인터넷에서 벌어진 온갖 사건과 사고들을 실어 나르고, 이에 질겁한 부모들은 아이들의 컴퓨터 접근을 막기 위해 골몰하기 시작했다. 전광석화처럼 순식간에 희망의 시간과 불안의 시간이 교차되었다.
정보사회의 전자 민주주의에 대한 전망은 그 중에서도 가장 압권이었다. 고대 아테네의 아고라에서 펼쳐졌던 직접 민주주의의 장엄한 광경이 시공을 뛰어넘는 전자 네트워크를 통해서 재현될 것이라는 충격적인 예언은 많은 이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미국 건국 당시 현실적 장벽에 부딪쳐 좌절될 수밖에 없었던 토머스 제퍼슨의 이상이 마침내 실현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전자 아고라의 단상에 먼저 오른 것은 제퍼슨이 아니라 조지 오웰의 빅 브라더였다. 네티즌들은 일상생활 구석구석까지 파고든 전자 감시의 차가운 눈초리에 몸서리를 쳐야 했고, 제퍼슨의 재림을 준비하기 위해 단상에 도열해 있던 디지털 전도사들은 당혹감에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아고라를 등진 채 뿔뿔히 흩어진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전자 민주주의의 신화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정녕 그것은 한낯 허황된 꿈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2. 정치는 그들을 오라 손짓하지만
흔히들 "젊은 네티즌들은 정치에 무관심하다"고 말한다. 그들은 신문의 정치면을 읽지 않으며, 참여하려 들지 않으며, 투표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다수의 정치 사이트 관계자들은 열심히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운영해봤자 찾는 이 없이 휑한 찬바람만 불고 기껏해야 비난과 욕설만 난무하는 감정의 배설구로 전락할 뿐이라고 푸념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우리나라 네티즌들은 결코 정치에 무관심하지 않다. 수많은 안티 사이트들을 자발적으로 만든 것이 바로 우리의 네티즌들이다. 하루에서 수십 편의 글들과 수백 회의 조회수가 기록되고 있는 곳이 바로 우리의 토론 게시판이다. 그리고 이들의 상당수가 정치 및 사회 현안과 관련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이래도 네티즌들이 정치에 무관심하다고 함부로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네티즌들은 생각보다 훨씬 정치적으로 깨어있다. 그들은 오히려 기성의 아날로그적인 낡은 정치보다도 저만큼 앞서 나가 있다. 정치는 그들을 오라 손짓하지만 오프라인적인 정치무대를 그대로 재현한 정치 사이트로는 그들의 눈길을 끌지 못한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자신의 안방에 한 상 차려놓고 팔짱낀 채 앉아서 네티즌들을 기다리고, 네티즌들은 안티 사이트와 토론 게시판에 따로 모인 채 그들만의 향연을 펼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 인터넷 정치의 풍경이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제도 정치 영역과 네티즌 정치 무대 사이의 간극은 현실 공간보다도 한층 더 넓게 벌어지고 있다. 이제 공허하게 전자 민주주의의 낭만적 신화만을 읊조릴 것이 아니라 기존에 마련된 정치 사이트들을 내실있게 운영하기 위한 방안을 먼저 고민하는 것이 당장의 시급한 과제일 것이다.
인터넷에서 만날 수 있는 정치 사이트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하나는 선거 특수를 겨냥한 상업적인 정치 사이트들이며, 다른 하나는 정당이나 정치인들이 개설해 놓은 홈페이지들이다. 물론 인터넷을 매개로 하여 국민들과 정치인들 간의 직접적인 소통과 참여의 장을 마련한다는 의미에서 인터넷 정치의 방점은 당연히 후자 쪽에 놓여지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막상 정치인들의 홈페이지를 들여다보면 그 실상은 실로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3. 정치인 홈페이지 천태만상
정치인 홈페이지 중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유형은 '홍보물'형 홈페이지다. 첫 화면부터 대문짝 만하게 등장하는 정치인의 인물 사진은 인기 연예인의 홈페이지를 능가하는 수준이며, 컨텐츠의 반 이상은 본인의 소개로 채워져 있다. 물론 정치인이란게 본래 국민들에게 얼굴과 이름 팔아먹고 살아야 하는 직업인지라 자신을 널리 알리고 싶은 심정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홈페이지는 결코 광고판이 아니다. 유익한 정보나 참여의 공간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홈페이지는 정치인 자신의 자기만족은 될지 몰라도 네티즌들로부터 외면 당하기 십상이다.
'박물관'형 홈페이지도 심각하다. 컨텐츠의 업데이트가 계절이 바뀔 때마다 큰맘 먹고 겨우 한번씩 이루어지는 게으르기 짝이 없는 홈페이지이다. 기껏 방문해봐야 늘 똑같은 내용 그대로이니 네티즌들이 더 이상 찾아갈 동기부여를 갖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쾌쾌묵은 낡은 컨텐츠를 골동품처럼 고이 모셔두고 있는 홈페이지는 그 자체가 데이터 스모그이다. 특히 이런 곳에 있는 컨텐츠일수록 대부분 소장 가치마저 별로 없는 것들인 경우가 많아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쓰레기장'형 홈페이지 역시 큰 골치 덩어리이다. 국민들과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해보겠다고 기껏 달아놓은 자유게시판이 대책 없는 욕설이나 광고물 등 온갖 쓰레기 정보들로 부지런히 업데이트되고 있는 곳을 말한다. 쓰레기장으로 변해버린 게시판은 운영자의 관리 소홀과 국민들의 정치적 불만이 빚어낸 합작품이다. 사실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란게 게시판 몇 개 달아놓았다고 해서 저절로 구현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무엇보다도 관리자의 충실한 답변과 생산적인 토론문화가 전제되어야 하는 일이다. 관리자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게시판에는 네티즌들의 공허한 메아리만 울려 퍼지고, 기껏해야 "깊은 관심과 좋은 의견에 감사드립니다" 라는 식의 형식적인 립서비스는 오히려 국민들의 분노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4. 홈페이지도 구조조정이 필요하다
전자 민주주의의 신화가 낳은 가장 커다란 오해 중의 하나가 "인터넷이 저비용 고효율 정치를 가능하게 해줄 것"이라는 전망이다. 물론 논리적으로는 충분히 설득력 있는 말이겠지만 솔직히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정치 비용이 절감되기는커녕 오히려 홈페이지 운영 관리를 위한 물적, 인적, 시간적 비용만 더 늘어났다. 게다가 정치과정의 효율적으로 이루어지는 징후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기존의 오프라인적 정치과정의 근본적인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인터넷 정치는 부가비용만 소모시키는 '고비용 저효율' 방식에 그치고 말 것이다. 이제 인터넷 정치도 구조조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정치인들의 홈페이지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자신의 개인 홈페이지 하나쯤은 필수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제대로 관리도 못하는 홈페이지, 그래서 찾아오는 이도 별로 없는 홈페이지를 굳이 고집할 필요는 없다. 또 어떤 이들은 엔터테이트먼트적인 컨텐츠를 가미하면 접속수가 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철 지난 정치 유머들을 부지런히 퍼 나르기도 한다.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보자. 이미 인터넷은 곳곳에 자극적인 컨텐츠들이 흘러 넘치고 있다. 썰렁한 정치 유머 몇 개 읽겠다고 굳이 정치인 홈페이지를 찾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흔히 하는 이야기지만 정말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관리도 못하면서 굳이 1인 1홈페이지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 공동 홈페이지를 운영하라. 정치적 지향이나 정책적 관심 분야가 비슷한 정치인들끼리 소그룹으로 모여서 독자적 브랜드를 가진 홈페이지를 공동 운영하는 것이다. 비용을 절감하면서도 훨씬 풍성한 컨텐츠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브랜드를 통해 자신의 인지도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얼마든지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개인 홈페이지일 경우라도 자신이 모든 컨텐츠의 제공자 역할을 과도하게 떠맡을 필요는 없다. 네티즌들이 즐겁게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메뉴를 제공하라. 각종 캠페인이나 이벤트를 기획해도 좋고, 네티즌들에게 고정 기고란을 마련해주어도 좋다. 조금만 신경쓰면 적은 비용만으로도 참여율을 높일 수 있는 아이템은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 '보여주는 홈페이지'가 아닌 '함께 하는 홈페이지'만이 전자 아고라를 등지고 떠난 사람들을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음을 명심하자.
(월간 How-PC, 2001.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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